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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살펴보기





마음이 없는 사람 있을까요


마음을 지켜본 적이 있나요


마음의 주인이 되어  

마음을 사용해 본 적이 있나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기재한 일기를 함께 읽어볼까요?




무지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계절 학기를 신청하려다가 같이 다니는

친구와 함께 하기 위해서 나 혼자 하지 않고

수업이 같이 있어서 만나서 이야기하고 같이 하려했다.

수업이 끝나자 친구는 어느새 없어졌다.

연락을 했는데 먼저 수강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일로 무지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줘야지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를 알지 못하고, 그 경계와 같이 놀고 있었다.


나의 마음을 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작은 일인데

그 경계에서 내가 이렇게 혼란해 했구나.

작은 일이지만 나의 공부 자료라는 생각을 했다.

더구나 내가 항상 친구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그 친구와 같이 하지 않으면

그 친구가 아쉽게 생각할 거야.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보니 조금 전까지 미운 친구가

처음의 친구 모습이었다.

내일은 아니 지금부터는

어제의 친구로 다시 대하여질 것 같다.

왠지 마음도 무거웠는데 가벼워진 느낌이다.


-서태은 님




                        
내 마음 살펴보기


 

우리의 마음은

그대로가

온전한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밉고, 예쁘고, 옳고, 그르고,

화나고, 짜증나고, 즐겁고 등등으로

변화무쌍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경계를 따라

(境界·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일들과 대상)

있어지는 마음입니다.


일어나는 마음과

내는 마음은 다릅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성인(聖人)들이

아만심(我慢心),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을

내지 말라 했지

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에서

‘성품은 작용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돌이나 나무처럼

아무런 마음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마음 작용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다만

경계를 대할 때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전제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미워하면 안 되는데,

        짜증내면 안 되는데 등과 같이)


그 있어지는 마음에

끌리는지 안 끌리는지

마음을 잘 살피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으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상황이나

자신의 순간적인 마음이나

상대방의 겉모습에 속지 않고

밝게 보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원리를 잘 알아

마음을 잘 사용하는

지혜로운 공부입니다.

용 어 풀 이

▶ 심지(心地)

          심지(心地)란 내 마음 땅을 뜻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살아있는 기름진 땅에서

갖가지 풀, 꽃들이 나오듯이

경계(境界·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일들과 대상)를 따라

천만가지 마음들이 나온답니다.


▶ 경계

경계는

      삶 속에서 내 마음과 만나는 모든 상황들,

      내 마음을 요란하게 또는 불편하게 하는

                 모든 사건 사실들입니다.

경계는 마음이 걸리는 것,

       마음에 걸리는 것입니다.


▶자성의 정(定) · 혜(慧) · 계(戒)


자성(自性 · 스스로의 성품)

자성의 정(定) · 원래 평화로운 마음

자성의 혜(慧) · 원래 지혜로운 마음

자성의 계(戒) · 원래 올바른 마음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을

간섭하지 않고

이미 일어나고 있는 사실적인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

자성의 정(定 · 원래 평화로운 마음)이 세워집니다.

일단 마음의 평화로움을 찾고 보면

주위 상황이 보여지고

상대의 심경이 이해되어지는

자성의 혜(慧 · 원래 지혜로운 마음)가 나와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中道)

이것이 바로 자성의 계(戒 · 원래 올바른 마음)가

세워진 것입니다.

 



       돋보기로 들여다보기

          돋보기1.

심지는 

요란함 · 어리석음 · 그름이 있다? 없다?


심지는 요란함 · 어리석음 · 그름이 있다?

심지는 요란함 · 어리석음 · 그름이 없다?


20세기는 이분법적 흑백논리의 시대였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사고는 결국

‘이것이냐, 저것이냐’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나쁜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다보니

마음을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심지(心地 · 마음)는 요란함이 있다”

혹은

“심지는 요란함이 없다”로

규정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경계를 대하기 전에는

요란하다 요란하지 않다는 생각조차 없는

고요하고 두렷한 마음이

경계를 대하면 화가 나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성품(性品)은

정(靜)한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

동(動)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합니다.

【대종경 성리품2장】


사람의 마음은

경계를 대하기 전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건마는

경계를 대하여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성인(聖人)이라도

경계를 대하여

그 마음을 챙기지 못하면

그 순간, 그 경계에서는 악할 수 있고


아무리 못된 악인(惡人)이라도

경계를 대하여

한 마음 챙기면

그 순간, 그 경계에서는 선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인과 악인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면

선 · 악이 원래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자포자기하거나 자만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저 사람은 원래 그래’하고 단정지어 생각하게 됩니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음을 죽이는 공부, 어리석은 공부를 하게 됩니다.

보조국사 지눌은 [수심결]에서

마음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참는 공부를 하는 것은

바위로 풀을 눌러 놓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참는 공부가 익으면

몸과 마음이 편한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언제나 앞에 나타납니다. 


드넓은 땅 위에

풀도 꽃도 자라지 않는다면

그 땅은 생명을 잃은 죽은 땅일 뿐입니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잡초를 뽑기 위해 잡초를 뽑는 것이 아니라

다만 곡식을 키우기 위해 잡초를 뽑듯이

마음의 평화와 지혜, 행복을 위해

요란함 · 어리석음 · 그름을 없게 하는 것입니다.

요란함 · 어리석음 · 그름을

없애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산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선악 염정(染淨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는

우리 본성에서 범성(凡聖 · 보통 사람과 성인)과 선악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은


우리 본성(本性 · 마음)에

소소영령(昭昭靈靈· 밝고 신령스러운)한 영지(靈知)가

있기 때문이니,


중생은 그 영지가 경계를 대하며

습관과 업력(業力)에 끌리어 종종의 망상이 나고,

부처는 영지로 경계를 비추되 항상 자성을

회광반조(廻光返照)하는지라 그 영지가 외경에 쏠리지 아니하고

오직 청정한 혜광(慧光)이 앞에 나타나나니,

이것이 부처와 중생의 다른 점이니라.]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11-

 

         돋보기 2.

심지는 
원래 요란함 · 어리석음 · 그름이 없다고 하였는데
왜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건가요?             

여기 한 그릇의 밥이 있습니다.

어떤 땐 맛이 있고 어떤 땐 맛이 없습니다.

똑같은 밥이지만 배가 고플 땐 맛이 있고

배가 부를 땐 맛이 없습니다.

이것을 볼 때 밥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밥은 그냥 항상 밥인 채로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세상 만사가 다 이와 같은 이치로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경계라고 말하는 모든 일들이

실은 있는 그대로일 뿐인데

그것을 분별하는 각자의 마음이 들어서

때로 좋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거슬리게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똑같은 일들이 어째서 어떤 땐 좋게 느껴지고

어떤 땐 거슬리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내 마음이 즐겁고 편할 땐

경계도 순하게 받아들여지고

이와 반대로 내 마음이 요란하고 화가 나 있을 땐

경계도 거슬리게 받아들여진다고

단순하게 넘겨버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어떤 사람은 호감이 가고

어떤 사람은 주는 것 없이 괜히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단순히 과거의 업력(業力)에 의한 상극의 악연이고

상생의 선연이기 때문에 그럴까요?


어쩌면 그것은 사실은 내 자신이

과거 무한한 세월 중의 어느 때

[이러 이러한 모습을 한 사람이 좋다.]

또는 [이러 이러하게 생긴 사람은 싫다.]하고

규정 지어놓고 살아오다가

실지로 그와 상응하는 경계를 만나게 되면

과거에 규정 지어놓은 그 마음이

그대로 발현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규정지어놓은 그 마음들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살아가면서 인연 닿는 대로 모두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호리(毫釐)도 틀림없는

인과 보응의 진리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좋다’,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원래 마음엔 그런 것이 없는데

내가 이미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하는 것을

마음속에 규정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계가 왔다는 것은

과거에 규정 지어놓았던 마음이 나타난 것이고

경계를 만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던 마음의 습관을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마음을 멈추고

마음의 흐름을 그대로 바라보고

원래의 마음을 확인한다면

그 순간

이미 원래 평화롭고, 지혜롭고, 올바른 마음이 세워지니

이것이야말로 기막힌 개벽이겠지요.


정산종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심량(心量)이 호대하면

모든 경계가 스스로 평온해지나니

이것이 곧 낙원의 길입니다.


심량이 협소하면

모든 경계가 사면을 위협하나니

이것이 곧 고해의 길입니다.


고락이 다만 자신의 견지 여하에 있습니다.]


-정산종사법어 응기편 39-

 

         돋보기 3.

│ ‘경계’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나요? │


1) 경계는 무죄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에게는 경계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경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정리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지럽고 지저분한 집이 경계이겠지만

털털하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경계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마음이 즐겁고 편할 때는 경계가 되지 않지만

화가 나 있을 때나 불편할 때는 경계가 될 수 있습니다.


피곤할 때는 사소한 것에도 짜증이 나지만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일이나 사람에게 관대해지기도 합니다.


경계는 무죄!!

   경계는 경계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민감하고 힘든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을

잘 알고 사용할 수 있다면 정말 살기가 좀 편해지겠지요?

경계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계를 괴롭히는 것이다.

2) 경계는 공부할 기회

         -경계를 통해서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산의 새소리에 산의 고요함을 깨쳤고

낙엽이 지는 모습에 바람을 느꼈다.

                            -일본 선시-


고요함 속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나기 전에는

고요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일어날 때,

우리는 고요함을 발견합니다.


경계는 고요함을 깨닫게 하는 새소리이며

경계는 바람을 느끼게 하는 낙엽입니다.


경계를 대하여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동안 내가 마음을 이렇게 길들여왔구나.’

‘그동안 내가 마음을 이렇게 사용해왔구나.’하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인간은 경계 속에 왔다가

경계 속에 갑니다.

경계는 피할수록 쫓아오고

싸안으면 흔적 또한 찾기 어렵습니다.


경계가 있기에 공부가 되고

경계가 있기에 단련이 되며

경계가 있기에 깨달음이 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공부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경계나 낮은 경계를 당할 때에

경계를 당했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정히 이 때가

공부할 때가 돌아왔다고 생각하여

경계에 휩쓸려 넘어가지 아니하고

그 경계를 능히 잘 부려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종경 선외록  일심적공장(一心積功章) 8>

순간마다 공부 찬스

경계마다 공부 거리

-좌산종법사-

                돋보기 4.

왜 그냥 “요란함”이라고 하지 않고

        “그 요란함”이라고 했나요?


지금, 여기서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그 요란함을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던

모든 요란함을 끌어오거나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걱정하는 불안에 속지 않고

또 현재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그 요란함을

그대로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만 할 수 있는 공부


요란해지면 요란함 공부

게을러지면 게으름 공부

무기력해지면 무기력 공부

그 상황에서만 그 상황을 공부할 수 있다.

그 경계를 통해서만 그 경계를 공부할 수 있다.

-류백철님-

 

                돋보기 5.

‘없게 하는 것’과

‘없애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요?


원래 요란함 · 어리석음 · 그름이 없는 심지에서

경계를 따라 갖가지 마음이 있어지는 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진리입니다.


경계를 따라 정상적으로 생기는 마음을

부정하고 없애버리려고 하면

없애려는 그 마음 때문에

더 요란해집니다.


원래 요란함이 없는 심지에서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의 원리’임을 알고

묘하게 받아들이면

자성의 정(定)이 세워져

그 요란함이 사라집니다.


마치 밝은 불을 비추면

어둠은 스스로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념을 통해

사념에서 빠져나갈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끝없이 그 자신을 부풀려 나갈 것입니다.


사념에 휘말려 들지 않는

유일한 길은

그 속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로 바라보세요!

깨어 있으세요!

 

                돋보기 6. ‘세우자’라고 한 이유는?


자성의 정 · 혜 · 계는

원래 나에게 있는 것이니

경계를 따라

잠깐 넘어진 것을

바로바로 세우기만 하면 됩니다.


많은 시간을 두고서

미래에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

과거의 모습으로 지금을 나를 단정짓는 것)

미래에 속지 말고

(미래를 막연히 꿈꾸는 것)

지금 여기에서

잠깐 넘어진 자성의 정 · 혜 ·계를

바로바로 다시 ‘세우자’는 것입니다.

 

중생심, 부처의 마음이 둘이 아니다.


본래 부처, 중생이 따로 없다.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여러 가지 마음들은

내가 발견하지 못하면 중생심이요

알아차리면 부처마음이니


내가 알고 있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뿐

중생심, 부처마음이 둘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님은

자신이 부처인 줄 아는 부처님이요,

중생은

자신이 부처인 줄 모르는 부처님인 것이다.


-정동주 님. ‘그 마음 덕분에 공부했네 ’ -

 

쉬어가는 페이지

                                        나란 어떤 존재인가?!


우선 난 항상 고정되어 있지 만은 않은 존재라 생각한다.

때로는 착하고 때로는 악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터프할 때도 있고

또 여성스러울 때도 있고,

사람을 대할 때에도 누구에게는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무뚝뚝하고 냉담하다.

사실 남에게 내 모습이 어떻게 비추어 질지 나도 궁금하다.

이기적이고 못되고, 말 받아 톡톡 쏘아붙이는

다만 그런 애인가!!


사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난 굉장히 모범생이고

그냥 착하기만 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굉장히 활발해졌고, 성격도 많이 변했다.

내 성격이 남들의 눈에 보일 땐

안 좋게 변했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난 내 자신 그 자체가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내 인격은 그 동안 살아온 내 모습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냥 착하기만 한 것보다는

내 의사를 자신 있게 밝힐 수 있고, 자신만만해진 내가 좋다.

앞으로도 상황에 따라 항상 변하는 나일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사람의 성품은 원래는 백짓장과 같다’고 생각한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지만,

여기서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백짓장 같은 존재(無善無惡)이지만

어떤 상황이나 때에 따라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할 수 있는

능선능악(能善能惡)한 존재!

이것이 사람의 본래 성품이 아닐까?


‘나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과제물이 나간 뒤,

아이들이 저마다 공책을 뜯어 이름을 쓰고, 칸을 나눠서

장점 · 단점을 써달라고 할 땐 난 정말 한마디도 적지 못했다.

‘어떻게 그 사람의 장 · 단점을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그 상황에 따라 정말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고,

거칠 수도 있고 부드러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사람의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반적인 그 사람의 성품에 대해

내가 느끼고 있는 바도 없지 않지만

그것을 써 줬다가 그 사람이 자신의 전부로 알고

가슴 아파하면 어떻게 할까?!

‘난 정말 이런 나쁜 애인가 봐’ 하면서

자신을 비관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내가 말한 것이 진짜 그 아이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자신을 그런 사람이라고 고정 지어 버리게 되겠지.

그것은 별로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다시 한 번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생각해본다.

그 동안 정말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해왔었다.

‘난 왜 꼭 나이여만 하는 걸까?’

‘내 영혼은 왜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는 없는 걸까?’

‘난 왜 내 부모님의 자식인 걸까?’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은 무엇이 달라질까?’

그 밖에도 정말 많은, 말도 안 되는 의문도 많이 가졌었다.

결국 난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냥 중학생 강혜정일 뿐이다.

물론 내가 지극히 평범한 그런 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난 사실 내 주위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많은 것들을 겪어 보았다고 생각하고,

또한 아픔도 많이 겪어 본 편이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내가 많이 성숙해 질 수 있었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요즘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기쁘고,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많다.

‘사춘기’라는 이 때에,

내가 세상에 대해 새롭게 눈떠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좋은 경험, 나쁜 경험 등 그 외에도

많고 색다른 경험들을 통해

그 경험을 스승으로 삼고, 나 자신이 성숙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변화될 나를 상상해보며

많은 것을 겪어 보게 될 나에게

힘찬 ‘파이팅!!’을 외치고 싶다.

-강혜정(중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