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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과 똑같은 네 마음


 


새 신발을 사려고 하면

모든 사람들의 신발에만 관심이 많아지듯이


우리가 자신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살면

‘또 다른 나’인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많아집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리게 된

마음 일기를 함께

읽어볼까요?

                                    



4×7=28을 모르는 너와

daoughter을 못 읽는 내가 같구나!



구구단을 3단까지만 외우는 선희를 남게 했다.


처음부터 무조건 외우라고 하지 않고

구구단도 덧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4에다 4를 더하면 8이 되고 8에다 4를 더하면

12가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4, 8, 16·····36을 써주고 반복해서 연습하라고 했다.


한참 후에 외우기 시작했다.

작은 소리로 외우는데 4×5=20

거기에 4만 더하면 할 수 있는 4×6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외우자고 하는데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얘는 원래 울어요”한다.


예전에 나는 우는 아이를 보면 참지를 못했다.

울면 우는 모습에 더 화가 나서

더욱 큰소리로 윽박지르곤 했다.

우는 선희를 보니 유난히 수학이 더디었기에

어려서부터 부모님께 배우면서

많이 혼나면서 배웠기에 수학을 하려 하면

그 괴로움이 울음으로 방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추측이 되어진다.

아이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라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보니 새로운 방법이 떠오른다.


손가락을 펴서 4×5=20 다음에 21, 22, 23, 24하고

손가락을 네 번 굽혀서 나오는 숫자가 답이라고 하니

알아듣는 듯 하다. 한참 반복을 하고 다시 외우니

이번에는 4×7에서 막힌다.

4×7=28을 10번만 하라고 하니 또 운다.

다시 하자고 하니  또 못한다.


그래, 24에다 4만 더하면 되는 것이 이렇게 어렵구나.

나도 어젯밤에 영어연수에서 내어준 자기 가족 소개를 할 때

쓰이는 daoughter를 도러로 읽어야 되는데

전에 익힌 습관으로 도터로 읽다가

‘아니, 이게 아닌데’하면서

다시 하려고 하면 도러는 도러인데

내가 내는 도러와 원제가 알려준 도러가 안되어서


몇 번 익혀도 조금 지나서 다시 하려고 하면 안되곤 했는데

너도 그렇겠구나!

24에다 4를 더하는 셈이 나는 쉽지만

너는 어려울 수가 있겠구나.

그리고 내가 긴장을 안 주려 해도

스스로 긴장이 되는 것 같다.


이제는 게임으로 하기로 했다.

선희가 4×1= 하면 내가 4하고 답을 내가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4×7에 가서는 내가 잘 모르겠다고

일부러 더듬거렸다.

그랬더니 선희가 답을 알려주는 것이다.

두 번째 게임에서 내가 일부러 겨우 4단을 외우고 나니

선희가 더 좋아한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고 이제는 바꿔서

선희가 답을 하라고 하니

4×7에서 28을 맞추는 것이다.

이제는 선희 혼자서 4단을 외우라고 하니

드디어 외우는 것이다.

정말 기쁘다.

4단 구구단을 외운 것만 기쁜 것이 아니고

선희와 내가 구구단을 공부하면서

내가 선희의 우는 모습, 잘 못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신앙을 했다는 것이 더욱 기쁘다.


선희가 나와 반 학기를 보내면서 수학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선희를 가르쳐야겠다.


-오세형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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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로 들여다보기


  돋보기1.

  다른 사람의 허물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면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보게 될 때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묘한 마음


결국 다른 사람의 허물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일기 한편     


절대와 상대


어떤 사람이 특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것과 상대되는 콤플렉스(complex)가 있기 때문이라고 융심리학에서는 이야기한다.


혜정이에게 이목구비가 모였다고 놀리는 선배가 있어 괴롭다고 하여 “그것은 아마 그 선배가 이목구비가 흩어졌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감정해주니 맞다라고 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런 말에 그렇게 마음이 상한 것은 혜정이의 마음이 ‘이목구비가 모여 있다’는 것에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그 말도 맞다.


그러나 나는 상대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가지고 내 공부를 해야지(절대의 세계, 나와 나, 상대가 없다). 서로의 마음에 대해 시비이해만 따진다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수준의 공방(상대의 세계, 너 VS 나)에 떨어진다. 끝이 나지 않고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마음으로 내 공부하게 되면 상대의 마음이 공부되어지고 신앙되어진다. 장산님 말씀대로 절대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깨끗이 빨 수 없다.


-이주원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원래는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들 중에는

인정하기 어려운 마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인정하기 어려운 마음들도

자신의 마음에서 경계따라 있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전에는 비난의 대상이었던 마음과 모습을 보았을 떄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그 때 자연스럽게 사랑과 자비는 나와지게 됩니다.

 















정산종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공(佛供)에는

자기 불공과 상대 불공이 있는 바,

이 두 가지가 쌍전(雙全)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 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 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공식을 배우는 것이니라.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13장-

 

   돋보기2.

  사실을 보나요? 생각으로 보나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자신의 생각으로 (고정관념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마음일기 한편     


남의 칫솔에 치약을 바르고····


오늘 점심 식사를 하고 난 후의 일이다.

종법사님 배알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그냥 갈 수 없었다.

숙소 세면장에 들어가 면도하고 난 후 양치할 때,

내 칫솔이 아닌 남의 칫솔에 치약을 바르고

닦으려고 한 순간,

내 칫솔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덜컥 겁이 났다.

당사자가 알면 얼마나 짜증날까?

얼른 그 칫솔을 물에 씻고 휴지로 물기를 닦아 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제자리에 두었다.

순간 이것이 주착심으로 인한 분별성인 것을 알아내었다.

내 성격이 내 물건에 손대는 것을 싫어함으로 인해(주착심)

그 당사자가 얼마나 짜증이 날까라는 분별성이다.

그리고 마음의 대중을 잡았다.


당사자가 짜증을 낼지 안 낼지

미리 판단을 내린 내 마음을 챙겼다.

내가 짜증난다 하여

다른 사람도 짜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서투른 내 마음이다.


그리고 만약 당사자가 알게 되면

나의 실수라고 말할 자신이 생겼다.


-안경훈 님

 

정신 차려!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잘 쓰는 말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정신을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라고 하셨습니다.



분별성은

좋다, 싫다, 밉다, 곱다 등으로

판단을 구별짓는 마음이며,

주착심은

그 구별 지은 마음에 집착하여

고정 짓는 마음입니다.


고정관념, 선입견이

바로

분별성과 주착심입니다.


그러므로 고정관념, 선입견을 놓는 것이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분별성과 주착심을 놓고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게 되면

자신의 어떤 모습에도 편안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겉모습으로                

그 사람을 고정 짓지 않게 되고

사실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마음 공부는

원래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悟得)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입니다.

 

쉬어 가는 페이지


▶인과보응의 이치를

  팔자나 운명으로 핑계 대며 속는 것이 아닌

  삼라만상의 성질로 그대로 그냥 이해하는 것.

명심해야 한다.

이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다지 좋지 않다.

어떤 뉘앙스가 따른다.

그것은 이 말 때문이 아니라 그대들 탓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쩔 수 없다고 느낄 때에 한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그대들은 마음속에 여전히,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품고 있다.

인간은 왕자가 아니라 거지처럼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 차이는 엄청나다.

시간은 그대가 이해하지 못할 때에 한해서 필요하다는 사실.

시간이 필요한 것은 인간이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眞如라는 것은 이해다.

어쩔 도리가 없는 운명이 아니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받아들였을 때,

그 진여의 태도 속에 원한 같은 것은 없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것이 삼라만상의 성질이라는 것을 이해할 뿐이다.

운명이나 팔자 같은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

“이게 신의 뜻, 그리고 내 운명이지, 미리 정해져 있던 거야”

한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거부가 있다.

이런 말은 그 거부를 매끄럽게 다듬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여란 마지못해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환영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진여의 태도란 것은 운명론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신이나 운명, 팔자와 같은

어떤 것도 끌어들이지 않는다.

단순하게 사실을 보라.

사태의 ‘사실성’을 그냥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하면 그곳에 문(門)이 있다.

문은 항상 있다

그래서 인간은 초월한다.

-라즈니쉬, 『信心銘』에서